시평 詩評

그러나 어쨌던

최승헌 2006. 4. 30. 08:44

 

 詩評 / 최승헌                   

 

 

                          그러나 어쨌든


                                                            마야꼬프스끼



              거리는 매독 환자의 코처럼 사라지고

              정욕의 강은 침으로 흘러갔다

              유월의 정원은 마지막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파렴치하게 앓아누웠다.

              나는 광장으로 나갔다

              불에 지진 동네를

              붉은 가발처럼 머리에 쓰고서

              내 입에선 미처 삼키지 못한 비명이

              사지를 버둥거렸다. 끔찍하게도.


              그러나 나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리

              예언자를 대하듯 내 흔적에 꽃을 덮으리

              이 모든 사라진 코들은 알고 있으니

              내가 당신들의 시인임을.


              당신들의 무서운 판결이 내겐 선술집처럼 무섭다!

              창녀들이 불타는 건물을 지나갈 때

              오로지 내 책만을 가져가리라, 성물聖物처럼 받쳐 들고

              내 책은 그들이 신에게 바치는 변명이니까.


              그리고 신은 내 책을 읽고 울음을 터뜨리리라!

              이건 말이 아니라 둥글게 뭉쳐진 경련이구나

              그는 내 시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하늘을 돌아다니리

              그리고 한숨을 쉬며 친구들에게 읽어 주리라.

          


  논리적, 추상적 사고보다 구상적 사고를 더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의 문학의식 속에서 시사성과 다양성을 가진 훌륭한 문학 작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인간 혼이 내재된 고뇌의 예술적 표현자인 도스또옙스끼나 솔제니친을 비롯한 러시아의 문학 작품은 언제 읽어도 우리에게 강한 내적 인식세계를 화두처럼 던져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미래파 시인 마야꼬프스끼의 열정적 시혼 속에 갇혀 지냈던 문학 지망생 시절의 내 영혼이 살아 꿈틀대는 듯 지금도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때 나는 마야꼬프스끼의 시와 정신의 깊이 속에 빠져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렬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미래파 시인인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홍수처럼 범람하든 열병을 식혔던 이십대가 생각난다.

 

  마야꼬프스끼는 정교한 화병을 만드는 일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고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하는 것은 자신의 관심 밖이라고 말한바 있다. 하긴 그 화병을 보는 사람에 따라 무엇을 담던 인식의 차이는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전통적이고 규칙적인 배열법이나 형식을 담지 않는 파격성이 있다. 그의 시는 시어가 모험적이고 투쟁적이다. 그 것은 그가 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시인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미래파들은 기존의 문학을 부정 했으며 새로운 시어의 개편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마치 1930년대 억압된 조국에 대한 그리움 또는 자연을 찬미하던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던 우리 시단에 인간존재의 질문, 그리고 현실과 본질의 대립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서정시 일색이던 한국시의 기존 틀을 깨고 문법구조의 파괴와 모더니즘의 구현자로 해성처럼 나타난 이상李箱을 맞이하던 때처럼 나는 그 당시 러시아 사회나 시단에서도 새로운 시의 출현이 순조롭게 받아들여 졌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전투적이고 열정적이던 혁명시인 마야꼬프스끼 안에 있는 연약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제대로 보았을까? 누가 그를 투쟁적인 광기의 시인으로 몰고 갔는가?

이 시에서 그는 당시 러시아의 혼란했던 부르주아적 현실을 부정하는 사회 변혁과 끝없는 자기 내면의 혁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낡고 관습적인 그러나 권위적인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또한 마야꼬프스끼는 시가 사물의 아름다움이나 읊조리며 빵이 되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고통스러워한 것 같다. 이것이 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의 정신적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상만을 꿈꾸는 유토피아적 사회를, 그리고 그런 정서의 글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혼란한 시대에 맞서서 온 몸을 던져 시를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가 곧 삶이여야하는 당위성을 그의 시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마야꼬프스끼, 그는 내 암울했던 이십대의 출발이 공허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던 그 불면의 시간들 속에 나타나 내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시인이다. 나는 날마다 은밀한 정신의 깊은 계곡으로 끝없이 나를 끌고 가던 그의 무례함마저 흠모했으니....

그의 시를 읽으며 새삼 먼 기억의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다.

어설픈 시를 끄적이며 삶과 죽음을 생각하던 그때의 열정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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