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수필/ 황학동 벼룩시장

최승헌 2011. 9. 18. 23:57

 

 

 

수필

 

 

                 황학동 벼룩시장

 

 

                                         최승헌

 

 

청계천 8가 부근에 가면 위태로운 것들이 많다

노숙자의 낡은 옷처럼 수명이 다 된

삼일아파트 뒷길을 돌아 황학동에 가면

추억 속으로 방생했던 물고기들이 모여 산다

한때 이 나라 구석구석 물 좋은 곳에서만 놀았던

때깔 좋고 튼튼한 녀석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추억을 잔뜩 먹어

만삭이 된 배를 내밀며 헤엄쳐 다니고 있다

 

누가 나 좀 데려 가 주세요

여긴 더 이상 헤엄칠 곳이 없어요

 

변화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와

오래도록 얼굴을 점령하고 있는

기미자국처럼 쓸쓸한 일이다

황학동에 이주한 자존심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괜히 옛 추억을 들먹이진 않는다

한낮의 햇살을 불러 올 때쯤이면

더러 성질 급한 놈 몇 마리는

물살을 휩쓸고 돌아다니다 붙잡혀서

제값도 못 받고 쉽게 팔려 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귀한 몸이다

살아온 날만큼 지워지는 것이 추억이라 해도

벼룩, 도깨비, 개미의 이름을 따라

추억의 폐부 속으로 흘러가는 물고기는

또 은밀한 비밀 하나를 만들 것이다

 

 황학동 물고기의 추억/ 최승헌

 

 

‘황학동 물고기의 추억’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시는 황학동 중고시장 좌판에 놓여있는 먼지 묻은 물건들의 정처 없는 유랑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물고기에 비유한 시다. 또한 물고기처럼 떠도는 인간의 삶과 회귀回歸적 마음은 세상살이에 묻

어있는 근심의 산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추억이라는 이름 속으로 방생했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우리네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와 가난이 공존하는 세상,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는 세상에서 한때

잘나가던 소위 때깔 좋은 환경도 영원히 가라는 법은 없다.

누구나 부자를 꿈꾸지만 때론 실패와 좌절에 내몰린 운명으로 인해 결국은 달동네까지 올 수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가는 삶의 유형에서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삶의 현실은 늘 인간을 슬프게 한다.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과정이다.

어떤 대상에게 특별히 정해진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처음부터 가난을 달고 나오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한가한 시간이면 혼자 황학동 벼룩시장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 6,70년대에서나 보던 오래된 중고 물건들이 길거리

좌판위에서 옛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을 만지거나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중고 물건을 흥정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

습을 보는 것도 좋다. 평소 세상나들이가 많지 않은 내게 황학동 벼룩시장은 마치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흔히 황학동 시장을 ‘시간이 멈춘 곳’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곳이

어서 언제라도 그곳에 가면 정겨운 옛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첨단의 과학문명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해도 인간은 때

로 편리한 지름길보다 둘러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바람소리 들으며 또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며 그렇게 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벼룩이 들끓을 정도의 고물을 많이 판다는

데서 '벼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있고, 또 불어로 벼룩을 뜻하는 단어인 'puce'가 벼룩 외 다갈색이란 뜻이 있어서 오

래된 가구시장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지만 어떤 것이 정설인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시장에 가면 처음엔 화려하고 싱싱했다가 서서히 퇴색되어가는 고물들처럼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우리네 인생이 보

여서 왠지 기웃거리게 된다. 인간의 생노병사가 시장 바닥에 늘려있는 낡고 오래된 물건들과 같아서 마치 현상계의 실체를 보

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미래를 예측할 수없는 무상의 시간이 인생이다. 돌고 도는 세상, 어제가 오늘과 같을 수 없고 오늘이 내일과 같을 수는 없다.

삶이란 늘 변화 하는 과정 속에 있어서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속의 촛불 앞에서는 부

도 가난한자도 모두 똑 같다. 언제 뒤바뀔지 모르는 운명이니 말이다.

이 가을에 우리네 삶이 팍팍해서 추수 뒤의 텅 빈 논바닥처럼 가슴 한구석에 싸한 바람이 찾아오거든 세상사 근심일랑 잠시

 내려놓고 황학동 벼룩시장에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곳에 가면 서민들의 눈물과 웃음이 가득한 삶의 애환을 만나게

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평사리문학관 집필실 이용작가 사화집  201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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