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글

석가헌의 추억

최승헌 2019. 3. 17. 10:30






정진규 시인은 몸시’, ‘알시와 같은 독자적인 산문시 양식을 개척했던 현대시의 독보적인 시인이다.

1960년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나 1967년 다른 동인들과 시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탈퇴하신 것만 보더라도 시적 개성이 남달랐다.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불이사상不二思想이 깊다. ‘에 대한 정신이 선생님 시의 근간을 이루기

시작 한 것이라고 생전에 자주 말씀하신 것을 보더라도...

불이는 불교의 뼈대이다. 화엄사상을 비롯해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상의 하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며 바로 불이사상이라는 것이다불이사상은 유와 무, 너와 나, 선과 악, 생과 사, 그리고

마음과 몸을 따로 분리해서 보지 않는 중도사상을 말한다.

이것은 만물의 조화와 원융이기에 이런 세계가 행복의 바탕이다.

내 시도 바로 이런 불이사상과 무관치 않다.

 

정진규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2년.... 

선생님이 계신 안성 석가헌夕佳軒 마루에서 향긋한 국화차를 마시던 기억과 함께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사모님의 미소와 시뿐만이 아니라 불교사상까지 말씀하시며 자상한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과의 추억이 새롭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두어 번 왔으나 받지 않았던 게 참 죄송스럽다.

오랫동안 소식 두절한 내가 궁금해서 아마 안부 전화를 하셨던 것 같다. 당시엔 어느 누구 전화도 받고

싶지가 않아서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살았다.

아예 휴대폰을 꺼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중요한 전화를 못 받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퇴원 후에라도 한번 찾아뵙던지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도 든다.

선생님이 그렇게 건강이 안 좋으신 것도 모르고 나는 그저 내 몸이 불편하고 해서 내 생각만 하고

그냥 무심했던 게 아닌가 싶어 아쉽기만 하다.

 

어느 해 여름날, 선생님께서 석가헌 이층 서재에서 내 글이 새겨진 다포를 드렸더니 다포의 글귀가

마음에 든다며 직접 써주신 액자가 지금도 내 방에 걸려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 글처럼 선생님은 평생 당신 시의 사상으로 추구하셨던 불이의 문으로 그 맑은 청산으로 돌아가신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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