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스크랩]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 최승헌

최승헌 2009. 12. 17. 08:46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신림동에 와서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너무 성급한 것을 깨닫는다

한 계절이 옷을 벗고 이곳까지 오기에는

돌아와야 할 길이 너무 많다

생선 한 마리, 소주 한 병도 웃돈을 얹어줘야 사는

굽고 허약한 길에 의지할건 사지육신 멀쩡한 몸이겠지만

이 동네에서 가을은

허파에 도둑처럼 숨어 들어와 잠을 싹쓸이 해버린

엉큼한 바람이거나

좁은 골목 촘촘히 박혀서 종일 고시생들의 밥만 해대는

밥집에 대기 중인 불린 쌀처럼

덜 여물은 몸을 붙들고 두 눈 시퍼렇게 뜨는 일이다

가끔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인사동 화랑에서나 보던

그림 같은 가을이 잠깐씩 목을 내밀기도  하고

어느 골목처럼 주차 시비로

고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오래 입지 않은 습기처럼 눅눅한 새벽이 열리면

누구보다 바쁘게 산동네를 내려가는 사람들

저들에게 희망이란 도시 곳곳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재빨리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어 놓은 프랜차이즈 체인점에서

뜯어먹는 치킨 맛에 비유가 되기나 할까

가난이 지지리도 못난 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삶이 강력 본드에 붙은 파리처럼 움직일 수 없는 땅에

오래 뿌리를 박아야 될 일임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  목이 갔다.  살갗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띠잉하다. 감기몸살이 분명하다. 

하늘이 높은데  눈이 아리고 머리가 흔들려 올려다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맑은 바람이 필요하다 싶어서 복도를 떠나 바깥길로 가보자고 나서는데  맹맹한 콧속으로도 화아악 달려드는 향기.  천리향 나무에 꽃이 피었나 휘둥그레 돌아보니 천리향 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곁에 선 두 그루 모과나무다.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가 피워낸 내음이다. 울컥...  그 자연스러움이 풍요가 고맙워서.  울컥하고 무엇이 치받고 오르자 그만 두 눈알이 벌겋게 열이 난다. 우웅웅웅 흔들린다. 몸살감기 기운에 비틀거리며 들어와 시를 읽는다. 시는,  그날그날 기운이나 기분에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저를 옮길 줄 안다. 아, 무궁무진한 시의 천만가지 얼굴이여. 그 또한 고맙다. 최승헌 시인의 시 몇 편을 읽다가  시인의 그 - 거리 - 에 닿았다. 시집을 주문하고 받지도 않고 마음이 든든하다. 좋은 친구를 얻은 셈이다. 시집이 올 때까지 나는 행복. 그러고보니 시인 또한 참 고맙다.

시인이여, 시여 건강하시라.

 

 

 

 

 

 

 

 

 

출처 : 영혼의 그늘
글쓴이 : 뷔겐베리아 원글보기
메모 :

 

37754

 

'문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우 속에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최승헌   (0) 2010.10.01
후배에게 쓰는 편지  (0) 2010.05.04
출판기념회  (0) 2009.02.10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0) 2008.08.13
시를 생각하며  (0) 2008.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