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폭우 속에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최승헌

최승헌 2010. 10. 1. 08:30

 

폭우 속에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최승헌

 

 

 

  며칠째 여름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8월25일, 경남 하동에 있는 평사리문학관을 가기위해 선원을 나섰다.

그곳 문인집필실에 먼저 도착해 있는 서안나 시인의 전화를 받고 떠나는 1박2일의 짧은 여행인데 내려가는 내내 비가 내린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까지는 적어도 5시간 이상을 운전해야하는 먼 길이건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천둥번개를 동반한 굵은

 빗줄기가 그치질 않아 천천히 운전을 해야 했다.

앞이 안 보일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 위로 번개는 사정없이 때리고 내가 운전하는 승합차는 그때마다 잠시 머뭇거린다.

다행이 옆자리에 김병욱 선생님(성대교수)이 함께 동행 하고 있어서 기상이 안 좋은 이런 악천후의 날씨지만,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빠져나가 악양면 평사리까지 가는데도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날을 잘못 잡은 것일까? 번개가 멈출 줄을 모른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어두운 빗길을 가며 시계를 보니 오후 6시30분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시간이 낮 12시 40분이니까 6시간이나 걸렸다. 폭우 때문에 덕유산휴게소에서 한 시간 정도 앉아있다 왔으니

실제로는 5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동은 그전에 쌍계사며 칠불사를 참배하기위해, 또 매화축제와 막사발축제를 보러 몇 번 왔지만 평사리문학관은 이번이 처음이다.

날씨야 어떻든 처음 가는 평사리 길이 가슴 설레인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드라마로 봤거나 책으로 읽었을

박경리 선생님의 대화소설 ‘토지’, 그 깊고 심오한 숨결을 찾아 토지의 주 무대였던 악양과 평사리로 가는데 어찌 설레이지 않겠는가.

악양면을 찾아서 가고 있는데 서안나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동읍 홍룡리에 있는 섬진강토지식당에 있으니 그쪽으로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함께 문인집필실로 가자고 한다.

폭우 속에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가다가 드디어 약속한 음식점에 도착했더니 서안나 시인은 권현형 시인과 경북대 박현수 교수,

서울대 방민호 교수와 같이 있었다. 김병욱 선생님은 그들과 구면이지만 나는 모두 처음 본 시인들이다.

내가 문단 사람들하고의 어울림이 별로 없어서 그 자리가 불편할 것 같았는데 그들은 초면인 내게 따뜻하게 맞아주어서 전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평사리문학관으로 올라오는데 어둠속에서도 한옥의 자태가 참 아름답게 비친다. 좁은 산길을 따라 오다보니 나무로

만든 작은 표지판에 ‘최참판댁, 상평마을회관, 토지세트장, 평사리문학관’ 등이 쓰여 있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표시해 놓았다.

여러 채의 한옥 집들을 지나 산 끝에 위치한 문인집필실에 들어서니 마치 절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다.

비도 내리고 밤이라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깔끔하고 아늑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에어컨과 세면장을 갖춘 방안은 깨끗하고 조용해서 문인들이 편히 쉬면서 작품을 쓰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 같았다.

이렇게 집필실마다 불편함 없도록 문인들에게 세심하게 신경 써준 관계기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만 그래도 이 대접은

아무래도 박경리 선생님의 은덕이 크다는 것을 실감한다. 불후의 명작인 ‘토지’가 없었더라면 악양 들판도 평사리 마을도

그냥 평범한 농촌으로 묻힐 뻔 했으니...

그리고 한 번도 뵌 적은 없는 평사리문학관 최영욱 관장님의 헌신적인 노고도 함께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넓은 문학관을 운영하고 관리 한다는게 얼마나 힘이 들까 싶다.

 

  오늘 빗속을 운전해 온데다 평사리문학관이 초행길이라 좀 피곤했는데 차를 마시라고 부르는 시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대충 여장旅裝을 풀어놓고 나가서 문인집필실 끝에 있는 정자에 모여앉아 차를 마셨다. 이곳 하동이 차의 고장이기도 하고

또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으니 차 맛도 그만이다.

거기다 밤비가 몰고 온 대숲의 향기에 묻혀 마시는 차의 맛과 향이 있으니 낮에 내렸던 폭우로 마음 고생한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특히 불자인 방민호 교수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마음공부는 절집 밥을 수 십 년 먹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와 나누는

불교이야기, 그리고 시인들의 시 이야기로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차를 마시며 대화의 꽃을 피웠다.

해마다 5월이면 나는 하동에서 만들어진 차를 사서 마신다. 주로 우전과 세작을 한꺼번에 여러 통 사지만 우전은 비싸서 내가

마시지 않고 차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나는 세작을 마신다.

굳이 우전을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세작도 맛이 좋아서이다. 하동을 떠올리면 항상 차와 대화소설 토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는데

마침 이곳 최영욱 관장님이 차를 재배한다고 해서 궁금해진다. 내일 아침은 최 관장님이 계신 차 전시장으로 간다고 하니 그가 만든

차를 한번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어디선가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나는듯해 잠을 깼다. 비도 그친 것 같고, 바깥은 기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새벽 5시에 잠을 깼지만 세수를 하고나서 방안에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다른 방이 아직 기척이 없기 때문인데다

괜히 내가 마당을 돌아다니다 인기척이라도 내면 그들이 누워있기가 불편 할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제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김병욱 선생님도 새벽 3시에 깨어나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방안에서 날 새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이곳 문인집필실은 식사는 모여서 하고(공양을 짓는 할머니 한분이 계심) 그 외에 글을 쓰는 시간은 자유인 것 같다. 각자 집필실이

있으니 그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집필실은 인터넷도 되고 세면시설에다 에어컨까지 갖추고 있어서 조용히 혼자 글을 쓰기엔

최상급이다. 바깥은 시골전경 그대로지만 방안 내부는 편리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평사리문학관의 멋과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대숲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으니 아무래도 다음에 한 번 더 내려와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어느 책에선가 보니 하동은 '느림의 3박자'를 갖춘 곳"이라고 했다. 자연과 사람과 문화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곳이기에 붙인 말 같다. 그래서 이 고장을 찾는 나그네의 마음까지 여유롭게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섬진강이 흐르고, 지리산

능선이 남으로 뻗은 끝자락인 성제봉 아래 넓은 평야지대와 박경리의 위대한 작품(토지)을 탄생시킨 배경을 갖고 있는 곳, 누가 이

아름다운 산천에 와서 서둘러 발길을 돌리겠는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서안나 시인이 잘 잤냐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녀는 머리를 감았는지 촉촉하게 물기에 젖은 긴 생머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밥상에 올릴 거라며 마당 한구석에 있는 텃밭에서 깻잎을 따고 있는 서시인의 모습이 다소곳한

새색시마냥 아름답다.

어제는 비가 많이 오는데다 밤이라서 평사리문학관 부근의 한옥들을 자세히 못 본 것 같아 이른 아침시간을 이용해 문인집필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네 마을에서부터 야산 끝까지 쭉 늘어선 한옥의 자태가 볼수록 마음에 든다. 여기가 25년 동안이나 쓴 한민족

대서사시인 대하소설 `토지'의 산실이라는 것이 신기하다.

 

  5대에 걸친 대지주 최참판댁의 큰 한옥과 평생 그 곁에 붙어서 먹고 살았을 소작인들의 초가집들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동학운동과

갑오개혁을 통한 그 시절 민초들의 강인한 삶을 생각나게 한다. 아침을 먹은 후 일행들과 섬진강을 따라가는 19번 도로로 향했다.

강줄기를 거슬러 가면서 바라보는 빼어난 경치는 말할 것 없고 하얀 백사장과 대숲의 절경을 어디다 비교하랴. 이 고장이 토지의

주 무대가 된 것도 어쩌면 자연환경을 사랑하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공생의 마음을 갖도록 해주신 박경리 선생님의 평소 철학

때문일 것이다.

호젓한 강변길을 지나가니 멀리 지리산 노고단이 보인다.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가 지리산 종주코스인데 나는 천왕봉아래에

있는 천년고찰 법계사에 도반스님이 있어서 산도 탈겸해서 지리산을 올 때면 꼭 이 섬진강 강변을 따라 지나가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 길은 지리산 어딘가에 잠들어있을 선배 고정희 시인의 영혼이 떠올라 매화꽃 만발한 봄이면 가끔 지나가던 길이기도 하다.

 선배의 직설적인 말에 상처받더라도 시에 빠져있던 그때의 젊음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

선배의 묘는 현재 생가가 있는 해남에 있지만 살아생전 지리산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또 거기서 삶을 마쳤기에 지리산은 언제나

시인을 생각나게 한다. 언제 비가 왔는지, 어제는 비가 그렇게도 퍼붓더니 날이 밝았다고 이렇게 시침을 뚝 땔 수 있는 건지 섬진강

그 깊은 물속만큼이나 모를 일이다. 섬진강을 따라 가다가 평사리문학관 관장이신 최영욱 시인의 차 전시장에 들렀다.

한쪽 벽에 각종 문예지와 직접 재배한 차를 진열해 놓았는데 차 재배 때가 지나서인지 차는 별로 안보였다. 하지만 관장님께 좋은

차를 한통 얻어왔다. 나중에 시흥에 와서 이 차를 우려서 마셔보니 차 맛이 아주 좋은 차였다. 십년 넘게 내가 마시고 있는 하동차도

좋긴 하지만 이번에 관장님이 준 차는 그것보다 맛은 더 좋은 것 같다.

같은 하동에서 생산되지만 차는 만들어내는 솜씨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처럼 느껴지는 최영욱 관장님은 사람을 참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섬진강과 토지문학관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주시니 많은 도움도 되었고 또 그의 따뜻한 마음까지 느껴와 짧은 시간 이였지만 이번 여행이 주는 의미는 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뜻 깊은 문학 여행길 이였으므로...

편히 쉬도록 배려해준 평사리문학관 최영욱 관장님과 좋은 곳에 불러준 서안나 시인에게 감사한다.

 

 

최승헌 약력

1980년 시문학 등단

동국대 교육대학원 졸업

시집 <고요는 휘어져 본적이 없다> <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산문집 < 사람이 그립다> < 바람, 그 끝자락에 서다>

경기문화재단 ‘우수창작발표지원금’ 수혜

 

이 글은 토지문학관 청탁원고며 어제 메일로 보냈다.

이번에 책으로 만들어서 문인들에게 나눠주고 또 그곳에 비치해 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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