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벗기 허물벗기 최승헌 파충류 파충류는 허물을 벗음으로서 생존이 시작 된다 태양열로 체온을 유지하며 새 피부를 만들고 적당한 거리 안에 들어온 먹잇감을 재빨리 낚아채기 위해서는 절대 이 허물벗기의 질서를 이탈하는 법이 없다 껍질 사람은 어머니의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왔지.. 시 2011.11.21
계란 반숙 서해바다 영흥도의 낙조 계란 반숙 최승헌 사랑은 계란 반숙이다 제대로 익지 못하면 껍질에 달라붙어 슬쩍 가버리는 이별처럼 허황하다 한순간 감정이 휘청거려도 처음부터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빛깔에 속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사랑이 미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고온에 .. 시 2011.09.11
추억을 해부하다 추억을 해부하다 최승헌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며 추억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묻혀 가고 싶지 않다 그건 나와는 상관없이 생짜배기로 빼앗긴 내 인생의 살점들이다 그동안 추억이라는 명분으로 빼앗긴 게 얼마나 많은지 마치 세금을 거두어 가듯, 내게서 챙겨 간 것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시 2011.05.31
해안선海岸線/ 최승헌 해안선海岸線/ 최승헌 내가 당신 몸에 숨어드는 방법은 늘 위장술로 시작 된다 아무도 눈치 못 채는 나만의 전략 을 위해 매운 마음은 갈비뼈 깊숙이 묻었다 당신은 직선으로 흘러도 곡선으로 흐르는 나를 만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당신은 우리 인연이 몇 겁의 윤회를 거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독.. 시 2011.05.02
아름다운 아침 / 최승헌 2011. 4. 6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아름다운 아침 / 최승헌 찬바람이 날을 세우는 이른 아침방금 목욕을 마친 두 할머니가힘겹게 목욕탕 문을 밀치며 나온다두 분 중 연세가 조금 덜 들어 보이는할머니가 허리춤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아마 남편에게 하는 듯.. 시 2011.04.06
꽃이 피는 것은/ 최승헌 꽃이 피는 것은/ 최승헌 꽃이 피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꽃으로 피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숙이 뿌리로 박혀 조용히 제 살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 피는 것은 땀과 열정에 대한 보답이며 슬픔과 근심에 대한 위로이다 깊은 어둠속, 환하게 밝히는 밑거름으.. 시 2011.02.08
새끼/최승헌 새끼/최승헌 내 나이 여섯 살 때, 짐 보따리처럼 잠시 맡겨졌던 병영 외갓집에는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거나, 동네 아이들과 술래잡기하느라 열무 밭을 모조리 밟아 놓아도 말없이 웃기만 하던 할머니가 계셨네 똥오줌 못 가릴 때도 지났고 말귀도 알아들을 나이였지만 괜히 어깃장을 부리며 할머니.. 시 2010.12.21
시를 위한 수행법 / 최승헌 시를 위한 수행법 / 최승헌 시는 죽음처럼 내 몸을 비우는 일이다 한 생애 번식했던 욕망으로 단단하고 때깔 좋은 언어를 물어와 가슴속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을 열어 비바람 같은 영혼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어두운 거리에 저 홀로 미아처럼 떠돌다가 말라빠진 제 몸을 .. 시 2010.11.05
반점半點 / 최승헌 반점半點 / 최승헌 시디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다가 가끔은 중간쯤에서 그만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싫증이 나서가 아니라 듣고 난 후의 공허감이 싫어서다 너무 속속들이 알아버린다는 것, 끝까지 갈대로 가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마지막 온점에 갇혀버린다는 것이 쓸쓸해서다 음악뿐이겠는가 그곳이 .. 시 2010.11.04
낙조 落照 구봉도 낙조 낙조落照 최승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맨 먼저 껴안아 본적이 없어요 당신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이 나는지 혹은 근심으로 덮여있는지 알 지 못해요 하지만 사랑이 재채기처럼 불쑥 찾아오는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오는지 이미 알고 있지요 당신이 아침부터 온 마을을 들락거.. 시 201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