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젖다 숲에서 젖다 최승헌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면서 고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경전처럼 무거운 고요가 숲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숲도 온전히 무르익으면 스스로 몸을 열어두는 것인지 잘 익은 제 몸을 활짝 열어 햇빛을 받아들이는 숲에서 무수히 자라나는 음모들이 환하게 빛이 난다 세상의 아침은 .. 시 2009.04.29
내가 돌아눕자 겨울, 내소사 내가 돌아눕자 최승헌 내가 돌아눕자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 한다 밤새 앓았던 상념이 꽃가루처럼 흩어져 한 평의 터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내 욕망이 근심의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눕자 바람은 무덤 속 이불을 개고 부스스 눈 비비며 나온다 건조한 세상 속에 오래 .. 시 2009.03.09
빛으로부터 얻는 것 빛으로부터 얻는 것 최승헌 빛이 보이지 않을수록 기억은 선명하다 기억을 한다는 건 빛을 잃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 빛이 무엇 이였을까 하고 가끔은 기억 속을 헤집고 들어가 점검해 보기도 하지만 빛의 뿌리부터 탐색하자면 내 서푼어치 양심부터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경.. 시 2009.01.29
밥도둑 밥도둑 최승헌 식사 때면 나는 도둑이 되지요 밥값을 못하기에 밥을 훔치는 도둑이 되지요 그래서 밥 앞에서는 기어이 죄인이 되고야 마는 나는 밥과 나의 경계를 만들어 서로 쫒고 쫒기는 게임을 하지요 밥 속에는 길이 있어요 이 도시의 눅눅한 문법이 제 몸을 말리기 위해 햇살 속으로 걸어가는 길.. 시 2009.01.12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안성 청룡사 도량에서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최승헌 신림동에 와서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너무 성급한 것을 깨닫는다 한 계절이 옷을 벗고 이곳까지 오기에는 돌아와야 할 길이 너무 많다 생선 한 마리, 소주 한 병도 웃돈을 얹어줘야 사는 굽고 허약한 길에 의지할 건 사지육신 멀쩡한 몸이.. 시 2008.11.30
어둠의 비밀 어둠의 비밀 최승헌 어둠이 출산하는 비밀을 알아내는 일은 간단하다 속전속결의 사랑처럼 아주 간단하다 네온사인에 목을 맨 밤이 어둠에 깔려 스스로 제 정신을 죽이는 일만큼이나 쉬운 문제 라는 것을 낮과 밤이 서로 교환해서 사는 거리가 말해준다 만취와 마취의 단어가 공존 하는 거리는 흥미.. 시 2008.08.04
여름 숲의 고요 여름 숲의 고요 최승헌 여름내 하늘로 뻗쳐있던 숲의 내장을 탐색하는 일이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는 곰팡이 같은 시간들을 뜯어먹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고요 속에 피고 지는 것들은 은밀한 거래를 꿈꾸면서 자주 제 몸을 감추기도 하지만 기가 센 것은 꺾어야 비로소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 시 2008.07.18
표적 표적 최승헌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환장하는 거리에 사내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사내들은 어둠을 잡아 목을 비틀어 버리는 일에는 익숙하다 그래서 언제나 이 거리는 건재하다 벌겋게 취기가 오른 사내들과 그 곁을 서성거리는 대리운전기사들도 각자 다른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 시 2008.06.26
가정방문 가정방문 최승헌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가정방문을 오신 날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던 어머니는 미안하고 급한 마음에 황급히 부엌으로 숨어 버렸다 선생님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 어머니 안 계시니? ’하고 물었고 나는 ‘ 네’ 하고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 했지만 거짓말을 하려.. 시 2008.05.01
황태 황태 최승헌 중부시장 건어물 골목 좌판 위에 바짝 말린 황태들이 비닐 끈으로 서로의 몸이 묶인 채 누워있다 장렬히 전사하여 죽어서도 함께한 의리가 엮여있다 하얀 가슴이 속앓이를 하다 지쳐 누렇게 변해버렸는지 황태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누워 있다 한때, 저것.. 시 200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