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둑

최승헌 2016. 9. 24. 09:18

 

운문사 길

 

 

 

밥도둑

    

                 최승헌

 

 

밥상 앞에 앉으면 나는 도둑이 되지요

밥값을 못하기에 밥을 훔치는 도둑이 되지요

그래서 밥 앞에서는 기어이 죄인이 되고야 마는

 

나는 밥과 나의 경계를 만들어

서로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지요

밥 속에는 길이 있어요

이 거리의 눅눅한 문법이 제 몸을 말리기 위해

은밀한 구멍을 찾아가는 길이 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와

생의 발목을 잘라 버리는 두려운 길도 있어요

밥은 내게 그런 길을 가르쳐 주지만

밥 앞에서 기죽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밥은 살기 위해서만 먹는 게 아니지요

한 됫박도 안 되는 밥그릇 속을 파헤치는 일이란

뱃살에 붙은 세월만큼이나 찾기 쉬운 일이예요

그러니 밥으로 대단한 꿈은 꾸지 말아요

밥에다 헛물을 타서 말아 먹지도 말고

밥그릇 속 깊숙이 상처를 숨기지도 말아요

밥으로 세상을 길들인다는 건

결국은 세상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동국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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