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길
밥도둑
최승헌
밥상 앞에 앉으면 나는 도둑이 되지요
밥값을 못하기에 밥을 훔치는 도둑이 되지요
그래서 밥 앞에서는 기어이 죄인이 되고야 마는
나는 밥과 나의 경계를 만들어
서로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지요
밥 속에는 길이 있어요
이 거리의 눅눅한 문법이 제 몸을 말리기 위해
은밀한 구멍을 찾아가는 길이 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와
생의 발목을 잘라 버리는 두려운 길도 있어요
밥은 내게 그런 길을 가르쳐 주지만
밥 앞에서 기죽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밥은 살기 위해서만 먹는 게 아니지요
한 됫박도 안 되는 밥그릇 속을 파헤치는 일이란
뱃살에 붙은 세월만큼이나 찾기 쉬운 일이예요
그러니 밥으로 대단한 꿈은 꾸지 말아요
밥에다 헛물을 타서 말아 먹지도 말고
밥그릇 속 깊숙이 상처를 숨기지도 말아요
밥으로 세상을 길들인다는 건
결국은 세상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동국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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