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우리가 물이되어 / 강은교

최승헌 2017. 6. 4. 07:56

 

 

 

우리가 물이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숲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인을 꿈꾸던 학창시절, 즐겨 애송했던 강은교 시인의 시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허무주의 시인인 강은교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시는 지금도 오랫동안 내가 암송하고 있는 시다.

짧은 문장속에 메마른 현실을 벗어나 물처럼 불처럼 잔잔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고싶은 그때의

내 마음이 들어있는, 서정적이고 자유로운 시여서 이 시가 좋았다.

나는 서정주 홍윤숙 권일송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했지만 그분들의 영향을 받은건 없는것 같다.

마야꼬프스키나 강은교 시인의 시를 좋아했으므로 이분들이 내가 시를 쓰던 햇병아리 시절 만난

내 시의 스승인셈이다.

 

사상계를 통해 등단한 강은교 시인은 당시 관념적이고 서정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던 시단에

관념과 서정을 뛰어넘어 폭넓은 주제의식과 삶과 죽음의 깊은 심층에 도사린 허무의식을

통해 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시인이다.

그래서 허무주의 시를 쓰되 허무 속에 잠수되지 않는 생명과 허무의 조화, 그리고 죽음의

정신적 체험까지 도달했을 것 같은 깊은 사유를 통해 느껴지던 그의 시에서 절제된 문장과

깔끔한 구성력이 돋보이기에 그의 등장이 내게는 참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은교 시인의 시 중에서 내가 즐겨 애송하는 시 " 우리가 물이 되어 " 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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