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시가 주는 여운

최승헌 2016. 9. 14. 15:37

       

                   

 

 

     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떠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더라도

 

 

몇해전이던가

이시인과 둘이서 kbs 공연장에서 부처님오신날 특집 음악회를 보고 나온 늦은밤

밖은 천둥소리와 함께 억수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삼양동 이시인의 아파트에 내려주고 나오려는데 이시인이 붙잡았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 좀 쉬었다 가라며...

생전 처음 가본 남의 집에, 그것도 밤 12시가 다된 시간이라

예의가 아니다싶어 그냥 오려니 이시인이 하도 간곡하게 붙잡는 바람에 잠시 거실에 앉았다.

때마침 귀가한 그녀의 남편인 김기택 시인이 반갑게 맞이해줘서 덜 미안했다.

셋이서 책으로 뒤덮힌 넓은 거실에 앉아 김기택 시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시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다.

창밖은 오래도록 비가 내리고...

결례인줄 알면서도 늦은밤 그런 시간을 갖을수 있었다는건

아마 우리가 시인이기에 가능했을거다.

이진명 시인의 시 "여행"을 읽다보니 문득 우리네 인생이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지않는 것이 꼭 닮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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