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좋은 시

최승헌 2010. 9. 21. 19:05

 

바위-그리고 내 꿈을 시처럼 꿔준 S시인에게/이진명


같이 산에 다니는 후배가 전화로 간밤에 꾼 내 꿈 얘기를 해줬다.
선배가 산 좋아하고 바위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자기 꿈속에서도
산속 높은 바위 위에 혼자 창을 열고 동그마니 앉아 있더라고.
같이 다녔던 익숙한 산속 풍경인데도 먼 저승 풍경 같았다고.
안개에 가린 듯 하여튼 선배의 모습이 아주 멀리 나가 있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싸해왔다고.
선뜻 부를 수 없어 머뭇거리다 거기서 뭐해 그만 집에 가야지 했더니
여기가 집이야 그러더라고. 아니 왜 거기가 집이야 진짜 집에 가야지 그랬더니
으응 여기가 내 집이야 또 그러더라고. 말할 수 없이 먼 얼굴로 먼 목소리로,
그래서 더 말 못 건네고… 선배 왜 꿈속에서까지 그러는 거야 도대체…


어머니도 같이 살던 외할머니도 버리고 간 집
새어머니를 얻은 아버지도
수재였던 남동생도 버리고 간 집
중학생 여동생도 고등학생 여동생도 버리고 간 집
최후의 나마저 버리게 된 집
집은
암자처럼
집은
바위처럼

높이 뜬 바위에 올라 오도마니 앉아 있으면 죽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온다
접속을 시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활처럼 온다
어머니와 담배 태우는 손가락의 백금가락지가 빛나는 외할머니가 마루에 나와 있다
어머니는 풀 먹여 바스락거리게 마른 이불호청을 걷어 와 대접의 물 뿜어 적셔 개킨다
다디미돌 위에 그걸 올려놓고 올라서서 밟는다 뒷짐 지고 꼭꼭 밟는다
할머니는 바깥 열린 대문간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어머니 다디미돌 위에서 내린다
밟던 이불호청을 확 펼친다 호청 확 펼쳤을 때 한차례 차게 젖었던 청량한 옥양목 냄새가 퍼진다
다시 물 뿜겨 다디미돌 위에 개켜 올려지는 호청 어머니는 뒷짐 지고 진자운동처럼 두 발로 계속 밟아나간다
말끔하게 앉아 있던 할머니 대문간 쪽 시선을 거둬 다디미돌 위로 옮긴다
뒤꼭지 은비녀가 다디미돌 모서리에 스치며 반짝 한다
사루비아와 맨드라미가 쏟아진 마당의 한여름 마당 모래알들은
태양의 불에 하얗게 튀겨지고 숨도 못 쉬게 모래알들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날아가고
막 대학생이 된 남동생은 폐결핵쟁이가 되고
중학생 여동생은 친구 따라 강남 가지 않고 교회 가 새벽을 울고
고등학생 여동생은 졸업하며 성당 성가대 알토 소리를
텔레비 방송국 합창단 알토 소리로 바꾸고
나는 수출회사 도안실에서 희고 파란 초크를 쥐고
일본의 기모노와 하오리 검은 비단 원단에
단풍과 매화와 국화와 청죽의 도안을 뜨며
어머니도 할머니도 새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남동생과 여동생 둘도 부르지 않았으나
남동생과 여동생 둘을 속으로는 불렀다

슬픔은 폐를 상하게 한다 그딴 소리가 있어서였는지
남동생의 슬픔은 돌이킬 수 없는 말기가 되어
환생의 먼 바닷가
굽은 해송이 있는 요양소로 가 자꾸 먹고 자꾸 잠자고
송년 가요무대 신년 가요무대로
날밤 백을 넣으며 사이키 조명을 쬐던 큰 여동생 뜻밖에
오빠의 슬픔을 제게도 접붙이고 싶었는지 입에 피를 물기 시작하고
날이 날마다 교회 가 찬송과 기도를 들어 바치던 작은 여동생
작은 여동생의 폐는 어떻든 하나님이 계속 막아주는 것 같았고
본래 둔해 슬픔이란 모르는
폐가 어디에 붙었는지 지금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나는
직장 출근과 퇴근에 동생들 등록금과 약값에
언제고 월급 받은 다음날부터 가불 신청할 생각으로 조바심쳤고


집이 있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한해 간격으로 집을 버리자
집도 제 숨을 버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도덕윤리 서로 무거웠지만
마침내 개천 다리를 하나 둘씩 건너며 모두 집을 버렸다
버렸다니 버릴 집이 있긴 있었단 말인가
언덕 위의 하얀
집노루 사슴 놀고 버찌가 익는
다락방 들창 하모니카 진주조개잡이가 사는

바위에 올라 오도마니 앉아 있으면 사실 아무 접속도 없다. 높이 떠올라 있다고 저절로 오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없다.
무주고혼들의 장난이 있을 뿐. 생활의 모양을 잠깐 찢어붙이기 해준 고혼들의 장난이 맘에 맞았을 뿐.
연년이 일월광 문지르며 백운 빨며 바람을 미역감는 바위에게서는 그런 고혼들의 냄새가 나고 소리가 난다.
바위는 無住가 有住가 된 고혼들의 주소. 그 외로운 주소가 너무 타오를 때면 왠지 내 아픈 살이 낫는다.
쑥뜸의 뜨거운 열과 향내를 쐬드키 나는 낫는다. 아무려나 아픈 내가 나을 수 있는 곳이 집 아닌가.
후배야 나는 진짜 집에 가지 않고 여기 내 진짜 집에 있으려네. 후배야 난 엉터리이니……
내 사는 집을 그대가 봐버리지 않았더라도 난 엉터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9년 문예지게재 우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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