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여행

최승헌 2010. 1. 14. 09:55

 

 

 

                             

  

                             

                     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 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 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 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떠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 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이진명 시인 약력

 

서울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1992년 민음사)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1994년 )

       ' 단 한사람 '(2004년 열림원 )

       ' 세워진 사람' (2008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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