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헌 시 비평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천년의 시작) 시집 해설

최승헌 2011. 9. 11. 10:13

 

[최승헌시집-해설]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천년의 시작)

 

 

‘밥’의 언어를 꿈꾸다

 

 

 

                                                                           고인환(문학평론가)

 

 

 

 

 

최승헌은 첫 번째 시집 『고요는 휘어져 본 적이 없다』(2003)에서 몸과 욕망, 자아와 세계, 세속과 신성 사이를 오가며, 중유(中有)의 넋을

 떠도는 시인의 역설적 운명을 선보인 바 있다. 일상적 삶의 진실을 서정적 언어로 길어 올린 최승헌의 시는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강박

적으로 추구하는 일군의 시풍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두 번째로 묶일 시집 원고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현실’과 ‘현실 너머’ 사이에서 진자 운동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현실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는 시선이 심화·확장되고 있음을 반영하는데, 서정적 자아의 발

화가 구체적 형상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는 더 깊어졌고 더 넓어졌다.

우선, 시인의 내면 풍경부터 엿보기로 하자.

 

 

내 슬픔이 금강삼매경 속에서 샤워를 할 때

허깨비 같은 정욕이 겁 없이 입을 벌리네

부실한 슬픔의 창자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기억이 모자이크로 도안 되어버리는 것을 알았네

그래서 가끔은 메틸렌 블루로 만들어

슬픔의 형체를 혼돈하게도하네

 

생이 투명하게 탈곡되어지는 전환점에

서 있은 후에야 이제 알겠네

색色이 공空의 빈 방을 서성일 때

날마다 무덤 속 이불이

한 장씩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그 잘난 것들이 평생 우리를 끌고 왔음을

아주 오래도록 몰랐네

 

어디서 왔는지 출처도 알 수 없는 마음

돌장승이 아이 낳는 까닭을 나는 모르겠네

유효기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생의 아궁이에

미련하게 군불을 지피며 저 마른 정욕의 시시한 것들이

내 슬픔의 창고를 지켜 줄 뿐이네

 

-「슬픔의 창고」 전문

 

 

‘허깨비 같은 정욕’, 즉 ‘저 마른 정욕의 시시한 것들’이 지키는 ‘슬픔의 창고.’ 최승헌 시인의 내면 풍경이다. 시인은 ‘생이 투명하게 탈곡되

어지는 전환점’에서 슬픔의 기억(무덤 속 이불)이 ‘한 장씩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생의 아궁이에/미련하게 군불을 지피’는 ‘그

잘난 것’(정욕)을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시인을 ‘지금 여기’까지 끌고 왔기 때문이다. 시인은 떼어버릴 수도, 그

렇다고 온전히 수용할 수도 없는 이 ‘색色과 공空의 빈 방’에 보금자리를 튼다.

‘슬픔의 창고’이기도 한 이 둥지에서 시인은 두 방향으로 길을 내고 있다. 하나는 ‘분실당한 유년’의 기억으로 난 오솔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주 정전이 되’는 세상으로 향하는 물꼬이다.

 

먼저, 과거로 잠입하는 화자의 오솔길을 따라가 보자. ‘온전히 치유하지 않고/긴긴날 그 상처에만 집착’하면 ‘상처는 발효될 틈도 없이/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풍란」)기 마련이다. 시인이 유년의 기억(상처)으로 길을 떠나는 이유도 ‘발효되지 않는 덜 여문 인생’을 ‘뼈골 빠지

게 지키고 있’는 ‘집착’을 떨쳐내기 위해서이다. 꼭꼭 숨겨둔 시인의 내밀한 기억이 펼쳐진다. 유년의 추억은 멀고도 가깝다. 다가서면 도망

가고, 짐짓 외면하면 끈질기게 들러붙는다.

 

 

새벽이 와도 바다는 억장이 무너지는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내 아버지의 냄새가 도배된

동해에 와서 한겨울 내내 심한 몸살로

기침소리 잦아지던 위태로운 바다를 본다

누군가 세상 밖으로 내 몰려

제 걸어왔던 길을 조용히 거두어가고 있는지

바다는 중병에 걸려 신음 중이다

 

한평생 뱃놈으로 살 팔자라며

평생 뭍으로 떠나 본 적이 없는

늙은 아버지의 휘어진 등에 붙어있는

햇살이 분실 당한 유년을 찾아 준다

 

- 얘야, 바다는 네 몸속에 살고 있단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비린내가

제일먼저 달려와 넉살좋게 설쳐대던

고향집 마당에는 아직도 유년의 상처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기억 속에서 한 번도 베어본 적 없는

모진 추억의 뿌리가 뱃심 좋게 버티고 있나보다

 

한때 내 심장에서 헤엄치는 것들은

어디로 떼 지어 흘러갔는지

수평선의 빗장을 열어도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바다가

내 유년의 신발 한 짝을 감추고 있다

 

-「바다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 전문

 

 

시인은 ‘아버지의 냄새가 도배된/동해’를 찾는다. ‘바다는 중병에 걸려 신음 중이다.’ ‘한 겨울 내내 심한 몸살로/기침소리 잦아지던 위태

로운 바다’는 ‘평생 뭍으로 떠나 본 적 없는/늙은 아버지의 휘어진 등’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몸속에 살고 있’던 바다, 즉 한때 시인의 ‘심

장에서 헤엄치던 것들’은 ‘수평선의 빗장’을 열어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아버지의 등에 붙어있는 ‘햇살’이 ‘분실 당한 유년’을 찾

아준다. 시인은 아버지를 매개로 ‘기억 속에서 한 번도 베어본 적 없는/모진 추억의 뿌리’가 ‘고향집 마당’에서 ‘유년의 상처’를 보듬고

 ‘쑥쑥’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본다. 여기에서 ‘유년의 신발 한 짝을 감추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바다는 ‘그리움이 터지고 갈라져 숙변처럼

쌓인 그곳’이 된다.

 

 

내 발 뒤꿈치처럼 갈라진

일상 속으로 슬슬 기어들어오는

해장술에 취한 아버지의

타향살이 가락 속에 헐떡거리는

허기진 유년을 보고 있다

 

나 때로 그리움이 터지고 갈라져

숙변처럼 쌓인 그곳에 가고 싶었다

아버지 술잔 밑에서 실없이 떠돌던 유년을

벌컥 삼켜버리고 싶었다

 

-「무료한 날」 부분

 

 

‘해장술에 취한 아버지의/타향살이 가락’에 ‘허기진 유년’은 ‘헐떡거리’며 풀어헤쳐지고, ‘아버지의 술잔 밑에서 실없이 떠돌던 유년’은 ‘발

 뒤꿈치처럼 갈라진/일상 속으로 슬슬 기어들’어 온다. ‘오래 동안 잘 먹지 않아 하얗게 곰팡이가 핀 오이지’처럼 ‘평생 물러터지기만 했던

아버지’는 ‘마든 등짝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은 식솔’들을 위해 ‘평생 뼛골이 빠’(「삭은 오이지와 아버지」)지게 일했다. 아버지의 삶은 이렇

게 화자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내면(유년의 기억)으로 향했던 시인의 시선이 ‘아버지의 삶’을 매개로 ‘지금 여기’의 현실과 포개지는 지

점도 바로 여기이다.

 

 

때론 이렇게 어긋난 숫자 속에 갇혀 너와 나 증오하며 사는 것도 행복한 일이라 믿고 싶어 때때로 유년의 기억을 풀어 너를 떠올리면 네가

 남긴 그리움의 자투리땅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으니까 언젠가 너를 만나러 동해에 갔던 적이 있었어 겨울 끝에서 미처 떠나지 못한 바람이

 분풀이라도 하듯 칼춤을 추며 덤벼들던 그 바다에는 소금에 절인 포구마다 어부들의 소주잔속에서 그들의 벌거벗은 생애가 떠다니고 있

었어 어업재해보상도 어로자금도 찾아와 주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오래 기생했던 근심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거지

 

겨울이 다 가도록 비릿한 갯바람을 몰고 다니는 건 어부들만이 아니었어 종일 명태를 말리던 아낙네들의 까칠한 손바닥에서 성난 바다가

출렁이는 것을 보았어 철조망에 머리가 박혀 장렬히 전사한 수 만 나리 명태의 눈알이 일제히 그 바다를 공격하고 있었어 우리가 뭍어서

품고 온 비밀도 그 날카로운 눈알에 잡혀 끝장이 나는 줄 알았어 그런데도 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내가 이곳까지 찾아와 손을

내밀면 네가 금방이라도 잡혀지는 줄 알았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가 내겐 너무 멀리 있다는 걸 이젠 알겠어 그래, 그 바다, 지금까지 어촌 아낙네들의 피부를 한 겹씩 벗겨 왔으니 이젠 그 손바닥에서 머물 때도 되었어 결국 우린 또 이렇게 애증만 갖고 잠시 이별을 하는 거지

 

-「유년의 바다」 전문

 

 

유년의 기억으로 떠난 시인은 ‘어부들의 소주잔속’에서 ‘그들의 벌거벗은 생애’를 발견하고, ‘종일 명태를 말리던 아낙네들의 까칠한 손바

닥에서 성난 바다가 출렁이는 것’을 목격한다. 아버지가 ‘어부들’과 ‘아낙네들’로 변주되는 장면이다.

이제 ‘그리움의 자투리땅’을 남긴 ‘너’(순수한 기억)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비로소 ‘네가 너무 멀리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애증만 갖고’ 순수한 유년의 기억과 ‘잠시 이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증의 양가감정은 과거와 현재, 유년의 바다와 현재의 바다, 그리

움과 황폐함 사이의 간극에서 발원한다. 따라서 이별은 유년의 상처(과거)를 내면화하는 동시에 황폐한 현실(현재)을 껴안는 행위가 된다.

이렇게 과거는 이별을 통해 현재와 접속한다.

 

다음으로, 유년의 기억을 통과한 물줄기가 사막 같이 황폐한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밥’의 서정을 감상해보자.

 

양수리 부근에서 마당극 “밥”을 보고 나와 시퍼런 물빛이 방안까지 따라 들어온 식당에서 밥을 먹던 목구멍에 밥이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세상만물이 돌고 돌아 서로의 밥이 되고 똥이 된다던 아까 보았던 그 밥이 걸려 자꾸 나를 붙들고 있다 밥값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온 내게

화풀이라도 하듯 이 한낮에 억센 힘으로 내 목을 죄여와 도저히 밥을 삼키지 못하고 있다 밥을 먹을 때면 밥 속에 신비한 묘약이 숨어 있는

지 자주 마술을 부린다 밥으로 길들여 놓은 몸뚱어리 구석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라도 튀어나와 내 목을 비틀 것 같다 밥 속에 잠시

길 떠났던 전생이 보이고 유효기간이 다된 세상이 보인다 밥의 힘으로 출세를 하고 밥의 힘으로 사기를 치고 밥의 힘으로 사랑을 하고 밥의

힘으로 이별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 퉤퉤, 침 발라가며 구겨진 돈을 몇 번씩이나 세어보던 새벽시장 아낙네의 거

친 손 같은 세상에서 밥은 더 이상 꿈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다 그저 부실한 몸 하나 지탱시켜주고 굳은살처럼 단단한 삶을 챙겨 줄뿐이다

둘러보면 이 세상, 돌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밥이 똥으로 돌아가서 세상 먹거리를 만들고 다시 똥으로 돌아가듯.

 

-「밥」 전문

 

 

시인은 마당극 ‘밥’을 감상한다. ‘세상만물이 돌고 돌아 서로의 밥이 되고 똥이 된다’는 내용이다. 그 ‘밥’이 자꾸 목구멍에 걸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시인을 붙들고 있다. ‘밥값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온’ 시인의 내면을 들쑤시는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유효기간이

다된 세상’에서 ‘밥은 더 이상 꿈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라는 인식에 다다른다. 다만 ‘부실한 몸 하나 지탱시켜주고 굳은살처럼 단단한 삶을

챙겨 줄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 세상, 돌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밥이 똥으로 돌아가서 세상 먹거리를 만들고 다시 똥’으로 돌아

가는 마당극 ‘밥’의 세계에 이른다. 관념(마당극 밥)이 내면(밥값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온 시인의 내면)을 거쳐 현실(더 이상 꿈도 분노도 아

닌 밥)로 투사되고, 그 현실이 다시 내면적 깨달음(밥이 똥으로 돌아가서 먹거리를 만들고 다시 똥으로 돌아간다)으로 전이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는 ‘침 발라가며 구겨진 돈을 몇 번씩이나 세어보던 새벽시장 아낙네의 거친 손’(아버지의 삶)에 대한 따듯한 연민의 시선

이 매개되어 있다.

 

시인이 세상의 풍경을 데우는 ‘밥그릇’ 속으로 들어가 ‘근심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돌게 하는 ‘콩장’(「콩장에 밥을 비벼 먹다가」)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낯선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 거리에 꽃이 피자 근심을 피우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꽃이 피어도 꽃향기가 함께 행방불명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아무 것도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의 하루가 저물면 종일 컴퓨터 속에서 신속하고

튼튼한 정보를 사냥하는 셀러리맨이나, 두 바퀴에 매달려 방부제 뿌려진 세상을 질주하는 퀵 서비스맨이나, 개업한지 며칠이 지나도 손님

 구경 힘들어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닭발집 주인남자나, 발광하던 네온사인이 현란한 춤을 멈출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서성거리는

대리운전기사들이나, 그들은 지금까지 자시들을 길들여 왔던 허약한 언어로는 한 끼의 밥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늘 밥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부분

 

 

시인은 ‘꽃이 피어도 꽃향기가 함께 행방불명’되는, ‘꽃이 피자 근심을 피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불임의 거리’에서, 이 불모의 세상이 사

람들(셀러리맨, 퀵 서비스맨, 닭발집 주인남자, 대리운전기사)을 길들이는 ‘허약한 언어’를 넘어, ‘멀리 있’는 ‘밥’을 얻게 할 수 있는 언어

(시)를 꿈꾼다. 이러한 시인의 따스한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최승헌 시인의 ‘밥’의 언어가 빚어내는 따뜻한 교감의 풍경 하나를 곱씹으며 두서없는 글을 맺기로 하자.

 

 

어무이, 안 추운교? 목도리 꼭 하이소

 

그러더니 호주머니에서 노끈을 꺼내

할머니와 자신을 꽁꽁 묶는다

그 가녀린 노끈이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먼 옛날, 자신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 하나로 생명의 줄을 연결하였듯이

지금은 힘없는 노끈 하나에

늙은 어머니와 늙은 아들이 연결된다

 

-「아름다운 아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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