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헌 시 비평

최승헌 시집 서평

최승헌 2009. 9. 14. 20:55

 

                                                                                                                                                           

 

 

 

밥의 변주를 통한 세상 읽기

 

 

                                      ― 최승헌 시집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천년의시작)

 

 

 

                                                                                         오채운

 

 

 

 최승헌의 시집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에는 밥에 관한 시가 많이 등장한다. 시인은 밥을 통해 세상을 읽고 자아를 성찰한다. 그래서 밥은 하나의 시적 대상으로 작용을 한다. 대상이 된 밥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해서 마치 한 인간이 자아를 발견할 때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밥은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추하기도 하며 그러한 반추를 통해 인생을 깨우치는 스승의 역할을 맡는다. 밥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때로는 서정을 때로는 풍자를 노래하듯이 최승헌의 시에서의 밥도 수차례의 순환과정을 거치며 인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밥상 앞에 앉으면 나는 도둑이 되지요

밥값을 못하기에 밥을 훔치는 도둑이 되지요

그래서 밥 앞에서는 기어이 죄인이 되고야마는

나는 밥과 나의 경계를 만들어

서로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지요

밥 속에는 길이 있어요

이 거리의 눅눅한 문법이 제 몸을 말리기 위해

은밀한 구멍을 찾아가는 길이 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와

생의 발목을 잘라버리는 두려운 길도 있어요

밥은 내게 그런 길을 가르쳐 주지만

밥 앞에서 기죽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밥은 살기 위해서만 먹는 게 아니지요

한 됫박도 안 되는 밥그릇 속을 파헤치는 일이란

뱃살에 붙은 세월만큼이나 찾기 쉬운 일이에요

그러니 밥으로 대단한 꿈은 꾸지 말아요

밥에다 헛물을 타서 말아 먹지도 말고

밥그릇 속 깊숙이 상처를 숨기지도 말아요

밥으로 세상을 길들인다는 건

결국은 세상 속으로 말려들어 간다는 것이지요.                            

 

                                                                                                              - 「밥도둑」 전문

 

 밥 앞에서 화자는 도둑이 된다. 도둑이 되는 이유는 밥값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우리는 밥 앞에서 큰 빚을 지고 살아가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밥값을 못한다는 죄의식은 화자에게 인생의 길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 길은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순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되는 길의 허망함을 화자는 경고한다. 모든 것은 자신이 의미를 두는 것에 달렸으므로 그 길을 통해 큰 꿈을 꾸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밥은 순수하게 밥일 뿐이지 길이니 꿈이니 하는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고 한다. 밥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세상 속으로 말려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 말려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세상 밖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밥에 대해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의미를 붙잡고 있는 동안 인간은 밥의 죄인이 되며 그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화자가 벌여놓은 이 게임은 결국 밥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지만 그렇게 발견한 진리를 놓아버리는 것, 스스로 게임을 끝내버리는 것을 통해 오히려 자유를 얻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귀결된다.

 

 밥 속에 잠시 길 떠났던 전생이 보이고 유효기간이 다 된 세상이 보인다 밥의 힘으로 출세를 하고 밥의 힘으로 사기를 치고 밥의 힘으로 사랑을 하고 밥의 힘으로 이별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 퉤퉤, 침 발라가며 구겨진 돈을 몇 번씩이나 세어보던 새벽시장 아낙네의 거친 손 같은 세상에서 밥은 더 이상 꿈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다 그저 부실한 몸 하나 지탱시켜 주고 굳은살처럼 단단한 삶을 챙겨 줄 뿐이다 둘러보면 이 세상, 돌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밥이 똥으로 돌아가서 세상 먹거리를 만들고 다시 똥으로 돌아가듯.                                              

                                                                                                                    - 「밥」 부분

 

 이 시에서도 밥은 여러 가지 의미로 몸바꾸기를 계속한다. 밥의 의미는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세상 밖으로 사라’지지만 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천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 사라지지 않는 원천적 힘, 즉 밥의 힘으로 인해 세상은 돌고 돌아간다. 그래서 밥은 꿈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것이 되며 계속해서 순환하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노가 꿈이 되고 꿈이 분노가 되는 순환과정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밥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 존재로 자리잡게 되며 밥으로 비유되는 ‘세상’ 또한 역동적 존재가 된다. 이런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세상 밖으로 사라지게 되는데 ‘세상 밖’이란 곧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밥은 이생뿐만 아니라 전생과 내생을 아우르는 존재로 그 의미가 확산된다. 밥은 이제 우주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오이지가 냉장고 안에서 시들어버렸는지 혀끝으로 와닿는 싱싱하고 아삭거리는 맛도 없이 씹자마자 입안에서 뭉개져버린다 평생 물러터지기만 했던 아버지의 삶처럼 흐물흐물 뼈대 없는 몸이 되어 있다.

 

                                                                                                     - 「삭은 오이지와 아버지」 부분

 

 이 시에서 인간은 냉장의 세계에 놓인다. 냉장의 세계는 모든 것을 조금 더 신선하게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며 신선함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차가운 온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 차가운 온도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온도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서로를 향한 차가운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온도(시선)를 견디지 못한 오이지는 차가운 냉장의 세계를 버텨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한 온도가 오히려 인간의 몸을 시들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오이지는 반듯하게 서지 못하고 ‘흐물흐물 뼈대 없는 몸이 되어’ 입안에서 바로 뭉개져버린다.

 

 이 시에서 오이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화자에 의하면 이렇게 인간의 삶이 ‘흐물흐물 뼈대 없는 몸이 되어’ 뭉개져버리는 이유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 연유한다. 이 시대의 언어는 바로 서지 못하고 허약하거나 비굴하여 인간과 협잡하며 인간은 ‘21세기 허약한 언어와 교배 중인’(「새벽안개」) 관계에 있다. 허약한 언어가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는 그 어떤 냉장도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언어는 허약하여 인간의 모습을 바로세우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면 비굴한 모습을 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어떠한 의사소통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의사소통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 개개인은 나약함의 세계로 함몰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길들여 왔던 허약한 언어로는 한 끼의 밥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늘 밥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비열한 언어들이 자라 숲을 이룬 이 거리에 빌붙기 위해 허겁지겁 살아온 세월만큼 숙성되어진 시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중략)생존은 비대해지고 몸은 축나는 것이 이 거리의 기본수칙이다

 

                                                                                               -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부분

 

 최승헌의 시에서 밥이 세상을 이끌어갈 원천적 세계로 비유된다면 언어는 현실적 상황을 은폐하는 이성적 존재로 비유된다. 밥은 순수한 것이며 언어는 비순수의 범위 아래 있다. 언어는 밥과 대립관계에 놓이며 이 대립관계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밥은 가까이하려 해도 멀리 달아나고 언어는 멀리하려 해도 가까이 다가와 인간을 허약하고 비굴한 세계로 몰아간다. 언어는 여러 시편에서 허약하거나 비열한 부정적 이미지로 비쳐진다.

언어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만큼 숙성되어진 시간’을 부정한다. 그 부정이 우리를 에워싼 숲이며 인간은 그 숲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숲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상은 자주 단절된 상태에 놓인다.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상황은 인간관계의 단절,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인간관계의 의사소통을 위한 대표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언어의 사용이 오히려 소통을 단절시키며 삶을 불연속적 상황으로 이끌어간다. 생존은 비대해지지만 그 실제는 오히려 축소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 인생의 ‘기본수칙’이라고 싸늘한 풍자를 던진다.

 

위태롭게 쌓아올린 배추 더미 사이를

떠다니던 냉기가 상인들의

몸 속으로 쑥쑥 파고들 때쯤이면

어김없이 국밥 한 그릇이

배달되어 온다

차가운 겨울 새벽에

빈 속을 데워줄 보약으로

뜨거운 국밥만한 게 어디 있던가

아직도 어둠인 세상을 깨우려고

바람이 밀물처럼 몰려오는데

고맙게도 꽁꽁 언 몸을

녹여준 것이 삼천 원짜리

저 국밥 한 그릇이었구나.                                                        

 

                                                                                                                      - 「국밥 한 그릇」 부분

 

 변주를 통한 순환을 거듭한 밥은 결국 인간이 발산하는 냉기를 감싸안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밥에 대한 화자의 인식 전환을 의미한다. 「밥도둑」에서 ‘밥’과 ‘나’는 게임을 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밥’은 ‘나’를 녹이고 나의 냉기를 녹여주는 존재가 된다. 이에 대한 깨달음은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자아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간과 밥이 게임을 하는 세상은 화자가 겪는 끊임없는 고통의 세계이며 냉기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위태롭게 쌓아올린 배추 더미’만큼이나 위기에 몰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겨울의 냉기가 더 배가시킨다. 이 냉기는 배추 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인간의 ‘몸 속으로 쑥쑥 파고들’어 인간을 한껏 움츠리게 만든다. 가중되는 위태로움과 냉기에 의한 억압을 국밥은 ‘어김없이’ 녹여준다.

 

위태로운 세상에서 ‘고맙게도 꽁꽁 언 몸을 녹여 준 것’은 언어나 지식이 아니다. 두터운 옷이나 값비싼 음식도 아니다. 그것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한 ‘삼천 원짜리’ 국밥 한 그릇이다. 화자가 꿈꾸었던 세상, 화자가 대결하려 했던 세상의 실체는 이렇게 소박함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최승헌의 시를 읽으면서 독자는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모든 사물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으며 흘러가다 보면 제자리에 돌아와 있고 제자리에 돌아와서 보면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그러한 움직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 때문에 고통당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숱한 의미들을 거두어들이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삼천 원짜리 국밥’ 한 그릇에 스르르 마음이 풀려버리는 작고 초라한 존재를 말이다.

 

                                                                                                    계간 ' 다층 ' 2009년 여름호  

 

 

오채운: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04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 ?모래를 먹고 자라는 나무?, 저서 ?현대시와 신체의 은유?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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