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헌 시 비평

최승헌 시 해설... 고요는 휘어져 본적이 없다

최승헌 2006. 11. 28. 09:26

평론

 


 

 

                     고요는 휘어져본적이 없다  -  최승헌 시집해설

 

미지의 시간을 따라 유영하는 낯선 물고기
-최승헌의 시 세계


 

                                                                             박 남 희(시인, 고려대 강사)



  욕망은 늘 그림자를 거느린다. 빛의 이면에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욕망은 빛의 속성과 닮아 있으면서 닮아 있지 않다. 빛이 사물의 표면을 투사해 어둠의 접경에 있는 그림자의 실체를 끄집어내어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다면, 욕망은 끝없이 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그림자의 실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말하자면 빛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투사이고, 욕망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발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빛과 욕망은 서로 닮아있으면서도 닮아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빛과는 달리 욕망이 만들어 내어 보여주는 그림자는 칼·융이 말하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무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측면을 말하는 쉐도우(shadow)의 성격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최승헌의 시를 읽을 때도 이러한 양상은 비슷하게 나타나 있다. 최승헌의 시는 그녀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수많은 형상의 언어들을 통해서 그의 내면적 자아와 세상이 만날 때 생겨나는 갖가지의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인 자신의 욕망의 지형도이다. 그런데 시인의 욕망은 세상에 자유롭게 발산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다. 이러한 양상은 종종 그의 시에서 '싸움'이나 '긴장', 또는 '불확실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최승헌의 시에 나타나 있는 내면적 갈등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몸에서 주사바늘이 빠져나간다 바늘은 내 몸을 빠져 나오며 차가운 액체를 핏줄 속으로 흘러 보냈다 액체 속에 낯선 물고기들이 정신 없이 헤엄쳐가고 있다 가본 적 없는 미지의 통로를 찾아 그렇게 허둥대는 것인지 물고기는 꼬리가 잘려 균형을 잃은 채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오래 전 나는 이런 기형의 물고기를 본적이 있었을까? 내 몸 어딘가에 몰래 들어와 기생충처럼 번식해 나가던 욕망이었거나 그것을 지탱시켜주는 한끼의 밥이었을 슬픔을 파먹으며 유랑하는 무리들, 시퍼런 눈알 굴리며 먹이를 삼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그것들의 생애가 되고 있다. 서두를수록 짧아지는 생애는 빛이 나는 건지 주사바늘이 황급히 빠져나갈 때마다 액체 속 물고기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내 깊어진 환부를 뜯어먹기 위해 잠복했던 수상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드디어 살아 버티기 위한 통증이 시작된다.

-「주사바늘이 빠져나갈 때」전문


인용 시에서 시인은 인간의 몸에 주사액이 주입되는 과정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물고기의 이미지를 빌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는 "낯선 물고기" 또는 "기형의 물고기"는 "내 몸 어딘가에 몰래 들어와 기생충처럼 번식해 나가던 욕망"의 알레고리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의 물고기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주사액이 섞여있는 핏줄을 따라 미지의 통로를 여행하고 있다. 이러한 물고기가 여행을 하는 목적은 시인 자신의 "깊어진 환부"를 뜯어먹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환자가 주사를 맞게 되면, 그 주사액의 약효를 통해서 아픈 곳이 치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서는 단지 "살아 버티기 위한 통증"이 시작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물고기가 시인 자신의 깊어진 환부를 뜯어먹는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욕망의 물고기가 몸 속으로 들어옴으로 해서 "살아 버티기 위한 통증"은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최승헌의 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통증'의 실체를 찾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보다는, 단지 그것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그것과 대면하여 싸워보려는 노력이 보인다.
인용 시에서 보듯 욕망은 외부에서 우리의 몸으로 침투한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지의 통로를 따라 여행을 하다가 "시퍼런 눈알을 굴리며 먹이를 삼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과의 싸움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승헌의 시에서 이러한 욕망은 종종 '습관'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나타나기도 한다.

기억이 상자 안에 갇힌 파리처럼 비행중이다 마침내 길은 끝나있었고 두려움이 끈적거리는 어둠의 액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머리 속에서 몇 개의 다른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습관이 나를 길들이는지 갔던 길을 가고 또 간다 반복은 우울하다 마치 덧칠하는 인생처럼 누가 나를 덮고 또 덮는 것, 그래서 날만 새면 내 몸에 한 장씩 붙어지는 청구서만큼이나 무거운 무게로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벌써 몇 시간째 나는 늙은 나무에서 부러져나간 쭉정이처럼 대책 없이 길 위에 누워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단단하게 썰어지는 불안의 토막마다 언뜻 언뜻 보이던 길, 나는 그 길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미망의 길이 나를 묶어두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란 느낌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기호가 어디선가 숨어서 훔쳐보고 있을 것 같다.

-「길 끝에서」전문

시인은 자신이 두려움 속에서 걸어왔던 길의 끝에 서있다. 길은 끝나있지만, 그 길은 '끝남'보다는 '반복'을 강요하고 있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 길이다. 시인은 "반복은 우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 우울한 반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각종 청구서만큼이나 무거운 무게로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습관의 중량감을 체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인에게 있어서 '습관'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불안의 토막마다 언뜻 언뜻 보이던" "미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의 불확실성 앞에 전율한다. 이 시에서의 '길'이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면, 시인은 자신의 불확실한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단지 '느낌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끝 부분에 등장하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기호"는 시인 자신과 대면하지 못한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shadow)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시인의 주변에는 도처에 '낯선 기호'들이 숨어서 시인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 자신의 삶이 습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요인가운데 하나로 '기억'을 꼽을 수 있다. 인용 시에서 보면 기억은 "상자 안에 갇힌 파리처럼 비행중"이다. "상자 안에 갇힌 파리"는 결국 같은 길을 왕복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가 갔던 길을 습관적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무의식을 끝없이 억압하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삶이란 것이 고정된 채널처럼/ 다시 왕복할 수 없는 정해진 길이 있다면/ 겹겹이 쌓인 기억의 겨드랑이 속을 뒤지지 않아도"(「비오는 날」)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쉽게 성취되지 않는다. 그의 기억은 아직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왕복 할 수 없는 정해진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이따금씩 기억의 길을 더듬어 가서 자신의 '흔적'과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그는 "문득 부재중이던 눈물이 보고 싶었어/ 다시 인생의 반환점이 그어진다 해도/ 날마다 알 수 없는 빛깔의 지친 유서를 쓰던/ 이 땅에 묻어있는 내 흔적들을 사랑하고 싶었어/그리고 그것이 아득한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어"(「산 속으로」)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산 속으로」라는 시에서 "생각의 잔영들이 벌거벗은 가지 위에 쓸쓸하게 걸려있"는 기억의 산 속으로 들어가 한 때의 "암울했던 날"을 기억해내고 "날마다 잠들지 못하는 바람의 울음소리"를 듣던 때의 자신의 모습을 추억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기억 속에는 어둡고 우울한 삶의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쉽게 기억이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개략적으로 말하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나 "새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늘 입는 옷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은
편안함보다 새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어느 날 불쑥 낯선 옷이 내게 찾아와 비로소 길들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황당함과 태연함을 거래해야 하는지 나는 안다
옷이 주는 자유의 사슬이 풀어질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 열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방정식을 풀게 할지
아니면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은밀한 곳에
많은 시간들을 넣어야 할지 하는 막막함을 이끌고
나는 또 다른 옷에 길들여지는 연습을 한다
내가 때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깊은 연민의 늪에 빠졌거나
혹은 분노로 눈물 흘릴 때 그 비밀에 적응하는 것 또한
훔쳐보고 있을 테니까.

-「옷 이야기」전문


옷은 우리가 늘상 입고 다니는 필수품이면서도 옷만큼 우리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없다. 시인은 인용 시에서 길들여진다는 것, 즉 습관의 편안함보다는 새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이 길들여지기까지 겪게 되는 마음상태를 시인은 '황당함'과 '태연함'이라고 표현한다. 황당함 속의 태연함이란 결국 '허위'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을 속이는 일임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옷이 주는 자유의 사슬이 풀어질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 열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방정식을 풀게 할지"를 우려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방정식"을 푸는 일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깊은 연민의 늪에 빠졌거나/ 혹은 분노로 눈물 흘릴 때 그 비밀에 적응하는 것"등을 말한다. 시인의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은 갑자기 닥친 외부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아의 내면적 갈등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한편으로는 외부의 눈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누군가 자신의 은밀한 행동을 "훔쳐보고 있"으리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가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노출된 땅"(「봄날」)이라는 인식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노출에 대한 불안의식은 그의 시 도처에서 보이는 갇혀있음에 대한 답답함과 짝을 이루면서 시인의 이중적 심리상태를 노정하고 있다.
시인은 한편으로 이러한 불안한 심리상태를 '바람'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포구는 가까워요
가끔 갯바람을 타고 포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우우 하고 들릴 때
근심도 바람처럼 일어나
꿈 속 두통으로 머물더군요

그것들은 재빠르게 내 심장을 관통하고
뼈 속까지 침입해서
아주 깊게 자리를 잡고 앉은 종기처럼
치유가 힘들어요
하지만 한 세상 근심 없이 살 수 있나요
살아온 날들이 희망 혹은 슬픔의 꼬리표를 달고
우리 곁에 서성일 때
그 허물 속을 뚫고 나오는 것은
모두 혼란이더군요

그래도 포구는 건재해요
오랫동안 저 알 수 없는 늪에서
실타래처럼 감겨져 있던
바람의 비밀을 기억하는 걸 보면

-「포구」부분


인용 시에서 바람은 심리적 유동성이나 내면성 혹은 불안 등을 상징하지만, 흔히 호흡의 상징으로 쓰이는 바람의 원형적 의미는 영감이나 의식, 영혼, 정신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람은 인간의 내면성이나 정신과 연관을 갖고 있는 사물인 셈이다. 1연에서 " 바람소리가 우우 하고 들릴 때/ 근심도 바람처럼 일어"난다는 표현 역시 바람의 이러한 자질과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바람을 통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근심을 마냥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도 '포구'는 건재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일종의 습관에 의한 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엄습하는 불안과 근심에 어느 정도 단련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세상 근심 없이 살수 있나요"라는 시인의 고백은 "바람의 비밀"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내적 다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의 또 다른 시 「바람의 잠」에서 시인은 바람이 "더욱 튼튼한 잠 속으로 떠나기 위해" "한 십리쯤 떨어진 마을/ 풍요한 햇살로 빚은 술을"마신다고 하여, 바람이 가지고 있는 유동성으로 인한 불안에 머물지 않고, 자연 속에서 찾아지는 넉넉한 정신으로서의 풍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문명화된 도시적 삶에 대한 답답함과 불확실성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문명적 편리성에 길들여져 가는 자신을 내밀하게 성찰해나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침이 되면 늘 정형화된 구조물 속의 세상을 열기 위해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일정량의 노동에 저당 잡힌 싱싱한 걸음들이 휴대폰 뚜껑을 열고 마침표로 끝나는 아침 인사를 하며 층층이 대기하고 있던 숫자 속으로 사라진다 각자 예속되어진 숫자 안에 갇혀 출근부에 사인을 하고 자판기에서 뽑아낸 커피 잔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컴퓨터가 켜지고 빌딩이 대낮같이 밝아지면 간밤 고단했던 도시의 간판들도 기지개를 켜고 찾아온다 드디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햇살이 삽입된다

―「도시인」전문

문을 닫으면 나는 사라지고 있다
날마다 나를 감금하는 컴퓨터 속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유령 속으로
최면에 걸린 듯 나는 사라진다
오랫동안 그에게 정복당한 습관이
나를 방조하고 있는 사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뿜어대는 중독의 가스가
나를 실신시켜 끌고 간 것이다
나는 식탁대신 감금된 컴퓨터 속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철저히 양육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보호자인 셈이다

―「중독성 환자」부분


첫 번째 인용 시에 따르면 도시인은 "정형화된 구조물 속"에서 "각자 예속되어진 숫자 안에 갇혀" "일정량의 노동에 저당 잡힌"사람들이다. 이처럼 도시인은 도시적 일상에 예속된 채 살아가는 기계적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의 아침을 열고 창문 틈으로 찾아드는 햇살의 내밀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시인은 도시인의 자연과 유리된 정형화된 삶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햇빛"이라는 표현을 써서 간접화시키고 있다.
도시적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적 안목은, 도시적 삶이 시인 자신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기성찰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 시는 시인 자신이 컴퓨터라는 문명적 이기에 중독되어 급기야는 최면에 걸린 듯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냉철한 이성으로 직시하고 있는 시이다. 시인은 "문을 닫으면 나는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문은 물론 컴퓨터 상의 문(window)을 말하는 것이지만, 문을 닫으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파격적인 진술은, 존재성을 위협할 정도로 컴퓨터에 중독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조적 풍자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컴퓨터에 의해 철저히 양육되어지는 갇힌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시의 말미에서 "그래도 문을 닫기가 무섭게 나를 낚아 채가는 /그가 기다려진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이러한 문명적 구속으로부터 쉽게 도망쳐 나올 수 없는 통제 상태에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드디어 충전 코드가 빠진다 밤새 내 몸 속으로 흘렀던 전류의 공급이 차단되는 시간, 전류가 잘 전달되었는지 혹은 예기치 못한 정전 사고라도 있었는지 한증탕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익은 몸의 나는 체크되어지고 있다 흡족하지는 않겠지만 대충 이 정도의 점검에서 아침이 나를 받아준다 내 몸 안 혈관 속에 충전되어진 전류만큼 움직이게 될 나는 재빠르게 조작되기 시작한다

신호등 앞.
나는 제지를 받고 서있다 통제되는 것은 누군가 내 심장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것이다. 그는 경계와 해제 사이를 지탱시키는 힘에서 밀려나 위태롭게 서있는 나를 점령하고 싶어한다 통제되므로 반란을 꿈꾸는 나는 어지럽다.

―「날마다 내 몸이 충전되고 있다」부분


인용 시에서 시인은 인간이 잠자는 행위를 기계가 충전되는 상태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 기계화된 인간은 스스로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체크되고 조작된다. 이처럼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미 기계문명의 통제권 안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신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물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으며 급기야는 인간 자체가 일종의 기계로 인식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난 문명의 힘은 "경계와 해제 사이를 지탱시키는 힘에서 밀려나 위태롭게 서있는 나를 점령하고 싶어하"고, 그러므로 "통제되므로 반란을 꿈꾸는 나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최첨단 과학기술이라는 인터넷 속에서 낄낄대며 들떠있는 유심과 피안의 다리를 건너고 싶어하는 무심의 유형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어둠의 소리에 대해」)를 궁금해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유심'이나 '무심'은 불교적 의미에서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시인이 인터넷이라는 어둠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는 일은 손톱깎이에서 퉁겨나간 발톱의 행방을 찾는 일만큼이나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인이 인터넷에서 어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불교적 의미의 적멸에 이르려는 마음가짐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저 길에 수직으로 붙어있는 고요는
한번도 휘어져 본 적이 없다
깊은 바다 속 해초처럼 모질게 달라붙어
온갖 지나가는 소리를 다 잡아 먹는 건지
보이지 않는 비장의 무기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눈만 뜨면 획기적인 신종식물들이 태어났다가
밤새 시름시름 앓아 죽는 거리에서
굴절된 문법을 배양시키고 있는 저 고요의 행간에
무덤 속 안부 같은 인사가 기생하고 있다
더러는 알 수 없는 행간의 비밀 속을
호기심이 발동해 기웃거려보기도 하지만
누가 그 음흉한 손길에 맨살이 찢겨 나갔는지
또는 골다공증으로 삭은 뼈를 분양 받았는지 모른다
그저 오래 전부터 저 길은 사계절이 한번도
제 때에 찾아온 적이 없는 길이다

―「길, 그리고 적멸」부분


인용 시에서 "저 길에 수직으로 붙어있는 고요"는 '적멸'과 상통해 있는 의미의 '고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수평적 삶이 우리 인간의 보편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수직적 삶은 행자가 적멸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 길에 수직으로 붙어있는 고요는/ 한번도 휘어져 본 적이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불교적 진리의 절대성과 경직성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요 속에서 "굴절된 문법"이 배양되고, "무덤 속 안부 같은 인사가 기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있어서 적멸에 이르는 길로서의 인생은 聖과 俗이 공존하는 침묵 속의 길이고 인생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굴절된 문법"은 말의 불확실성과 폭력성이 난무하고 있는 "뇌신경 세포처럼 얽혀있는 세상"(「禪定」)의 제유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이처럼 말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말의 실체는 한번도 명확해본 적이 없다"(「말의 이분법」)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시인은 「말의 이분법」에서 덧없는 말이나 설익은 말의 허세를 버린 은둔의 말, 즉 默言을 권고하고 있다. 불확실한 말은 불확실한 사고를 낳고, 불확실한 사고는 결국 無明(어둠)에 이르게 할 뿐이다. 시인이 말하는 이러한 말은 불교적 의미의 '화두'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왜 뛰느냐
왜 걷느냐
왜 웃느냐고
밤이 쓰러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있다
울고 있는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다
얼굴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암담한 바람들만 몰려와
아무 쓸모도 없는 문제와
아무 쓸모도 없는 해답으로
순간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지금쯤 그녀의 심장 안에 날아와
꽂히고 있는 화살은 1세기 먼저 간 구름이다
구름은 그녀의 튼튼한 뼈를 싣고
오체투지로 뻗은 밤을 나르고 있을 거다
그러나 화살이여, 다시 한번 명중하라
어둠을 잘라먹으며 아직은 눈떠있는 그녀의 심장 안에.

―「깨어있는 밤을 위하여」전문


<故 高靜熙 시인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시인이 어둠 속에서 죽은 시인과 대화를 나누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만약에 이 시에서 '그녀'가 고정희 시인이라면, 그녀가 묻고 있는 "왜 뛰느냐/ 왜 걷느냐/ 왜 웃느냐"는 말은 시인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선문답일 뿐이다. 시인은 깨어있는 밤, 즉 죽은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의 덧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시인은 "그녀의 심장 안에 날아와/ 꽂히고 있는 화살은 1세기 먼저 간 구름"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구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1세기 먼저 누군가 허공에 날려보냈던 말의 화살, 즉 화두의 집합체 정도로 해석된다. 시인은 말한다. "화살이여, 다시 한번 명중하라/ 어둠을 잘라먹으며 아직은 눈떠있는 그녀의 심장 안에."라고. 아마도 시인은 그녀가 다음의 생에 이르지 못하고 中有에 떠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뼈를 보호하고 있던 살 몇 점이 꿈틀거리고 있다
살의 원동력은 꿈이다
꿈을 꿀 때만 살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살 속 망망대해에 떠도는 꿈이 비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심장의 박동이 끝날 즈음 익숙한 솜씨로
살을 토막내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꿈의 힘이다
(중략)
허물어지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고
단단한 것은 더 여물기 위해 내 생존의 모가지를
비틀어대고 있다는 것을 꿈속을 파고 들어가서야 느낀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적당히 안심하는 모든 것들이
꿈속에서 살을 파먹고 사는 욕망의 뼈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여다보면 꿈속은 어금니 깨물며 지켜야할
비밀도 없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곳인데
눈을 뜨면 무엇이든 끝장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비열하게도 꿈속에서만 자라나는 환상을 뜯어먹고 있다.

―「꿈이 꾸는 건 꿈 안에만 있다」부분


지금까지 시인은 미지의 시간 속을 더듬어 오면서 습관 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발견하고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쉽게 경계지을 수 없는 이 땅에서의 삶을 관조적인 눈으로 묘사해 보여준바 있다. 하지만 시인이 희망하는 삶을 현실 속에서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용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시인이 부질없는 꿈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시인이 그래도 살, 즉 생명의 원동력이 꿈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은 결국 꿈을 먹고살 수밖에 없다. 시인은 꿈을 통해서 "허물어지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고/ 단단한 것은 더 여물기 위해 생존의 모가지를 비틀어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처럼 최승헌의 시는 허망한 현실 속에서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꿈을 통해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것도, 미지의 시간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낯선 물고기로서의 자신의 존재성이 끝없이 살아서 꿈틀거릴 수 있는 것도 결국 이러한 꿈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최승헌의 시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애써 감추려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시는 정직하다. 그의 시는 욕망이라는 자신의 내면적 지형도를 그려나가면서도 직설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길이나 산, 빛과 어둠, 바람, 물, 그림자, 밀실 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절제된 형상적 언어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만큼 그의 시는 객관적이고 명증하다. 그의 시는 기억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억압되었거나 상처 입은 말들의 표정을 섬세한 詩眼으로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다. 그의 시가 관념의 경계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때때로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자신을 맡겨 놓고 있으면서도 감상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자신의 내면에 포진해있는 욕망의 실체를 객관적인 눈으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인에게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은 자신과 대상을 향한 냉철한 시인의식과 시에 대한 열정과 절제된 사유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그의 시적 여정이 그의 삶과 어떻게 만나고 어떤 긴장상태를 유지해나갈지 진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제3의 문학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