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헌 시 비평

중유의 시학( 최승헌 시 비평)

최승헌 2006. 5. 22. 21:03

 

 

중유中有의 시학

-최승헌의 『고요는 휘어져 본 적이 없다』(2003)

 

                                                                             고인환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최승헌의 시는 내면과 풍경, 관념과 실재, 일상과 종교 등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점이지대를 산다. 이들이 스미고 짜이면서 직조해 내는 서정적 무늬는 몸과 욕망, 자아와 세계, 세속과 신성 사이를 오가며, 중유中有의 넋으로 떠도는 시인의 역설적 운명을 주조한다. 최승헌의 시에 음각된 풍경의 진솔함은 이 모순된 운명을 수락하는 눈물겨운 긍정에서 발원한다.

 최승헌의 시는 기교와 우직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이 곡예의 긴장이 빚어내는 떨림과 진솔함이 순정한 서정의 무늬로 촘촘하게 박혀 있다.

최승헌의 시는 기교의 현란함에 함몰되어 체험적 삶의 진실을 포착하지 못하는 가벼운 시풍이나, 호소력 있는 정서를 언어의 그물망으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생경한 이미지의 노출에 그치는 시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유사한 이미지의 반복이라든지 정제되지 못한 산문적 진술 그리고 직유적 표현의 남용 등은 시적 대상을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데 적지 않은 장애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최승헌의 시가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따끈따끈한’ 시라기보다는,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된 진실을 서정적 언어로 길어내는 ‘훈훈한’ 시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한계는 그의 시가 지니는 진정성의 순도에 큰 흠집을 내지 않는다.

 먼저, 시인이 세계를 내면화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시인이게 ‘몸’ 은 자아와 세계의 격전장이다.


   내 몸 어딘가에 몰래 들어와 기생충처럼 번식해 나가던 욕망이었거나 그것을 지탱시켜주는 한 끼의 밥이었을 슬픔을 파먹으며 유랑하는 무리들,…(중략)…내 깊어진 환부를 뜯어먹기 위해 잠복했던 수상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드디어 살아 버티기 위한 통증이 시작된다.

(「주사 바늘이 빠져나갈 때」부분)



 시인의 몸은 ‘몰래 들어와 기생충처럼 번식해 나가던 욕망’ 이나 ‘그것을 지탱시켜주는’ ‘슬픔을 파먹으며 유랑하는 무리들’ 과 대면하는 장소이다. ‘깊어진 환부’ 를 뜯어먹기 위해 잠복한 이 ‘수상한 그림자’ 의 심연을 응시하고 내면화하는 작업은 ‘살아 버티기 위한’ 운명적 ‘통증’ 을 수반한다. 이러한 몸의 통증은 ‘살의 원동력은 꿈이다’ 라는 전언을 통해 다시 욕망으로 투영된다.



   살의 원동력은 꿈이다

   꿈을 꿀 때만 살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살아가면서 적당히 안심하는 모든 것들이

   꿈속에서 살을 파먹고 사는 욕망의 뼈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여다보면 꿈속은 어금니 깨물며 지켜야할

  비밀도 없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곳인데

  눈을 뜨면 무엇이든 끝장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비열하게도 꿈속에서만 자라나는 환상을 뜯어먹고 있다.

(「꿈이 꾸는 건 꿈 안에만 있다」부분)



 시인에게 ‘꿈(욕망)’ 은 몸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꿈속에서 살을 파먹고 사는 욕망의 뼈대’ 나 ‘꿈속에서만 자라나는 환상’ 은 ‘살아가면서 적당히 안심하는 모든 것’, 즉 일상의 관습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꿈속은 어금니 깨물며 지켜야할/비밀도 없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속에서만 자라나는 환상을 뜯’어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시인이 아닌가. 이러한 몸과 욕망의 삼투 작용은 자아와 세계를 진동하며 시인의 모순적 운명을 체현하고 있다. 몸과 욕망의 밀회를 조금 더 엿보기로 하자.



   누군들 그 사랑의 내장 속으로

   투신하고 싶지 않으랴

   그런 사랑 하나쯤 씹다만 껌처럼

   내 신발 바닥에다 붙여놓고 싶다

   …(중략)…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랑이면 좋겠구나

   그렇게 발광을 하다보면

   윙윙거리는 기계 속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독거미 한 마리가

   엉큼한 내 사랑의 비밀을 훔쳐보겠지.

(「이런 사랑」부분)



 ‘납작 엎드린 채 포복하여 눈에 띄지 못하는/은밀한 바닥’ 에 기생하는 시인의 사랑(욕망)도 ‘그 집 앞’ 을 지날 때면 벌떡 일어나 ‘제 분수를 모르고 날’ 뛴다. 이미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하나가 된 욕망이 시인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인은 이러한 욕망과 몸의 상간相姦을 초자아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객관화하고 있다. ‘엉큼한 내 사랑의 비밀’을 ‘독거미’ 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훔쳐’ 보고 있는 장면은 욕망과 몸의 결절점結節點을 현기증 날 정도로 섬뜩하게 응시하는 시인의 내면 풍경에 대한 은유이다.

 몸과 욕망의 변주에 대한 심화된 응시는 외부 세계로 확산되기도 한다. 시인은 스스로의 내면을 ‘폐염전’에 투사한다.



   무엇인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

   장대비 내려 폐염전 들판을 사정없이 후려쳐도

   땅 속 어딘가에 숨어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아마 버릇없이 찾아온 예고 없는 불청객에게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오래 전 윤기 나는 빛들이 모여 살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이주해 갈 때

   미처 실려가지 못한 서러움이 눈물로 보였을까



   …(중략)…

   한때 우리 곁에 머물렀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것이 못내

   그리움의 깃털을 흘리고 간 흔적이라면.

(「장대비의 쓸쓸함에 대하여-폐염전 들판에서」부분)



 시인의 내밀한 욕망의 지형도가 아스라한 파문을 그리며 ‘폐염전 들판’ 으로 번져간다. 폐염전의 은폐된 욕망이 ‘장대비’ 라는 매개를 통해 ‘미처 실려가지 못한 서러움’ 이나 ‘그리움의 깃털을 흘리고 간 흔적’ 으로 포착되는 장면은, 내면으로 향했던 ‘독거미(초자아)’ 의 시선이 외부로 확장된 경우이다.

 이렇듯, 최승헌의 시는 자아와 세계의 심연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이를 통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을 찾아 나선다. 이 끈의 실루엣을 언어로 포착하려는 작업이야말로 시의 운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승헌의 시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으로 이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는 ‘해탈’ 과 ‘집착’ 사이에 보금자리를 튼다. 초월과 현실 사이에 놓인 심연, 그 가장자리에 시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물처럼 덮어쓰고 있던 집착의 모자

   아직 벗을 때는 멀었겠지만

   이제 그만 삼매의 꼬리에 매달려

   달빛 속으로 떠나도 될까요?

(「월등삼매경을 읽으며」부분)



 ‘집착의 모자/아직 멋을 때는 멀었’ 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성하면서도, ‘삼매의 꼬리’ 에 매달려 ‘달빛’ 속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메타포이다. 시 쓰기란 ‘그리움을 살인하기 위한/저 황홀한 움직임’ 에 동참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리움의 ‘피를/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빨아먹’ 는(「G단조 위에서 덫에 걸리다」)작업이기도 하다. ‘애증의 그리움’ 인 시가 시인에게 ‘끝끝내 풀지 못할 방정식’ 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 길에 수직으로 붙어 있는 고요는

   한번도 휘어져 본 적이 없다.

   …(중략)…

   굴절된 문법을 배양시키고 있는 저 고요의 행간에

   무덤 속 안부 같은 인사가 기생하고 있다

   더러는 알 수 없는 행간의 비밀 속을

   호기심이 발동해 기웃거려 보기도 하지만

   누가 그 음흉한 손길에 맨살이 찢겨 나갔는지

   또는 골다공증으로 삭은 뼈를 분양 받았는지 모른다

   그저 오래 전부터 저 길은 사계절이 한번도

   제 때에 찾아온 적이 없는 길이다

   …(중략)…

   만만한 저 길의 침묵은 끝끝내 풀지 못할 방정식이다.

(「길, 그리고 적멸」부분)



 이 방정식은 ‘고요의 행간’, ‘길의 침묵’ 을 채우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한번도 휘어져 본 적이 없’ 는 이 ‘고요’ 를 붙들고 씨름하는 존재, 즉 ‘中有의 넋으로 세상을 떠도는 존재’ 이다. 그렇지만 시 쓰기가 관념으로 굳어지기 이전의 미세한 삶의 기미를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시인은 ‘곧 다른 세상 속으로 섞여가야 할’ 유동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의 여행이 이성의 영역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길떠나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여행은 ‘관념의 벌레’를 다스리는 작업을 전제로 한다.



   관념의 벌레들을 다스릴 수가 없다

   벌레들은 서로 뒤엉키는 법 없이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한다

   움직이는 것은 늘 건재하다

   서슬 퍼런 눈을 뜨고 이리 저리 기어다니다가

   밤마다 곰팡이 냄새나는 내 꿈을 갉아먹고

   튼튼한 살 속에 숨은 내 척추를 갉아먹고

   걸핏하면 흔들리는 내 사랑을 갉아먹고

   벽 속에 갇힌 은밀한 어둠을 갉아먹고

   촘촘히 엮어놓지 못한 부실한 내 언어를 갉아먹고

   비로소 잠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뻔뻔스러움을 보았는데

(「비오는 날」부분)




 ‘서로 뒤엉키는 법 없이/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 하는 늘 ‘건재’ 한 관념의 벌레는 시인의 ‘꿈’, ‘척추’, ‘사랑’, ‘은밀한 어둠’, ‘언어’ 등을 갉아먹는다. 다스려지지 않아 넘쳐나는 슬픔을 안고 시인은 ‘다시 찬란한 꽃의 이름으로 태어나기 위해/혹은 단단한 언어로 여물어지기 위해’(「예감을 위하여-태풍」) 길을 떠난다. ‘적멸에 머물지 못해 흔들어대는 바람소리’ 와 어우러져 떠나는 길은 비록 멀고 험한 여정을 예비하지만, 이성(현실)의 안개 속에 가려진 희미한 섬(초월)에 대한 희망을 예감하기에 소중하다.



   깊은 혀 속에서 말의 수문을 열면

   하루 종일 방류할 말들이 떼지어 흘러갈

   조금은 어둡고 침침한 너와 내통할 강이 보일 뿐이다.

(「말의 이분법」부분)



 ‘말의 실체는 한번도 명확해본 적이 없’ 지만, 그래도 ‘말의 수문’ 을 열면 ‘조금은 어둡고 침침한’ ‘너와 내통할 강’ 의 흔적을 얼핏 보여준다. 이 강의 궤적을 좇아 길떠나는 자야말로 우리 시대 시인의 초상이 아닐까. 이제 최승헌 시인의 길떠남이 언어의 텃밭에서 ‘진흙 속의 연꽃’ 으로 피어나기를 기대해보자.

                                                                  

                                                

                                      2006년 젊은 평론가상 수상작 

                                       문학평론집  "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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